LiSA - Crossing Field (『소드 아트 온라인』 1쿨 OP)
최근 현실세계에서 들은 말이 있습니다. 그놈의 스마트폰 붙들고 있을 시간에 책이나 한 권 보라는 거였죠. 그놈의 인터넷이랑 게임 하면 머리 나빠진다, 문명의 이기는 인류의 퇴보를 유발한다, 디지털 기기 쓰지 마라, 뭐 이런 거요.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도 이런 소리를 지겹도록 들어 보신 분들이 꽤 있으실 겁니다. 물론 읽는 사람이 있다면요.
이와 관련된 책으로 『가장 멍청한 세대』라는 책이 있다는데, 안 읽어봤습니다. 구글링을 해 보니,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인 듯 합니다. "요즘 젋은 것들은 생각이 없다. 역사 정보가 부족하고 어휘 능력이 떨어지며 수학적 지식이 모자라다. 기본 상식도 없다. 무식한 것들. 빼애액." 아무리 봐도 화조재리(禍棗災梨)요, 불쏘시개인 듯 합니다. 라노벨 살 돈도 없는데 그딴 거 살 여유가 어딨어요.
불쏘시개(...) 짤. 물론 사진의 책은 절대 불쏘시개가 아니고 오히려 양서죠.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 - 앞으로 "그들" 이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 은 자신들이 살던, 그리고 어떻게 보면 지금도 살고 있는 그 지나간 시대를 찬양하며 "멍청한 세대"를 가루가 되도록 까고 또 갑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도 그런 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신경쓰지 않습니다. 잊어버렸거든요.
이런 주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 보겠습니다.
"요즘 젊은 것들은 스마트폰에만 빠져 있으며 인터넷과 게임에 시간을 낭비한다. 이런 것들을 할 시간에 차라리 뉴스를 보고 책을 읽어라."
그리고, 이 문장들을 살짝만 바꿔 보겠습니다.
"요즘 젊은 것들은 컴퓨터에만 빠져 있으며 PC통신과 지뢰찾기에 시간을 낭비한다. 이런 것들을 할 시간에 차라리 뉴스를 보고 책을 읽어라."
"요즘 젊은 것들은 TV에만 빠져 있으며 드라마와 코미디 프로그램에 시간을 낭비한다. 이런 것들을 볼 시간에 차라리 신문을 보고 책을 읽어라."
"요즘 젊은 것들은 라디오에만 빠져 있으며 스포츠 중계와 음악 방송에 시간을 낭비한다. 이런 것들을 들을 시간에 차라리 신문을 보고 책을 읽어라."
"요즘 젊은 것들은 영상매체에만 빠져 있으며 영화와 사진에 시간을 낭비한다. 이런 것들을 볼 시간에 차라리 신문을 보고 책을 읽어라."
전혀 위화감이 없죠. 실제로도 이랬고요. 그러면서 그들은 점점 사람들이 아는 것들이 줄어든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아는 것"이라는 건 사고능력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지식이죠. 무조건적인 암기입니다. 한국 교육이 그렇게 욕을 먹으며 어떻게든 고쳐 보려고 하는 그거요. 왜 E=mc^2인가? 상대론적 운동량이 어쨌고 테일러 전개가 어쨌고 그걸 이해하는 걸 원하는 게 아니죠. 그냥 외우면 되는 겁니다.
현대인의 기억력이 과거보다 떨어지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과연 그런 게 필요할까요? 자, 여기서 잠깐 고대, 유사 이전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봅시다.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모든 지식은 사람들이 뇌로 외워서 말로 전달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문자가 발명되자 그냥 책만 보면 다 나오게 됐지요. 이차방정식 근의 공식이 뭔가요? 이상기체의 성질이 어떻게 되나요? 외우지 않아도 책만 보면 알 수 있게 된 겁니다. 당연히 사람들이 외우고 다니는 지식은 줄어들었죠. 그러면 책이 인류의 퇴보를 유발하는군요! 모두 태워 버려야겠습니다!
짤방은 재탕해야 제 맛입니다.
"그들"도 이런 말을 들으면 "개소리 집어쳐! 책이 무슨 퇴보를 유발한다는 거야"라고 할 겁니다. 하지만 자, 본질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이 글과 책 사이에 내용사상의 본질적인 차이가 있나요? 정확성? 둘 다 인간이 쓴 겁니다. 애초에 책이라고 정확성이 더 나았다면 불쏘시개라는 은어도 없었겠죠. 그러면 뭘까요? 전문성? 다시 말하지만 그렇다면 불쏘시개라는 은어도 없었겠죠. 접근성? 그건 내용상의 차이가 아닙니다. 사실, 없습니다. 둘 다 글입니다.
문명 5에서 문자 기술을 연구하면 지을 수 있는 불가사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입니다. 아니 외우면 되지 왜 저런 존나 큰 건물에 책을 빽빽하게 담아 둡니까? (웃음)
자, 다시 문자와 책의 발명으로 돌아갑니다. 사람들이 암기하고 있는 지식이 줄어들고 대신 기록매체에 지식이 기록되기 시작하자 인류의 발전은 오히려 급속히 빨라졌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죠. 첫 번째, 기록매체는 인간의 뇌보다 훨씬 편리합니다. 인간의 뇌는 자주 잊어버리며, 사람당 한 개밖에 없고, 사람에 따라 성능의 차이(...)도 심합니다. 하지만 기록매체는 보관만 제대로 하면 기록한 그대로, 수명이 다할 때까지 유지됩니다. 두 번째, 기록매체는 여유를 만들어 줍니다. 기존에 뇌로 외우던 것들을 매체에 맏기고 인간은 여유롭게 좀 더 복잡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죠. 그리고 이런 장점이 현재 와서 극대화된 것이 바로 IT기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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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로 인한 인간의 인지능력의 퇴보도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실제로 디지털 세대는 일리노이의 주도는 커녕(스프링필드입니다. 시카고가 아닙니다. 오마 브래들리 원수가 이와 관련된 일화가 있지만 글 내용과 관련 없으니 나중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수도(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시드니가 아닙니다. 캔버라입니다)도 모르는 것이 많죠. 하지만 스마트폰을 쥐어 주고(배터리가 충분해야 한다는 제약이 있습니다) Wi-Fi를 연결해 주면 "그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은 오스트레일리아 관련 정보를 순식간에 찾아낼 수 있습니다. 10초면 전체 지도를 보고 국기, 수도, 언어, 수도 시간, 환율, 수도의 현재 날씨, 국토면적, 인구, GDP, 기후, 종교분포를 알아내고 국가를 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어를 할 수 있다면 트위터와 페이스북으로 어지간한 신문보다 빨리 정보를 얻어낼 수 있으며, 구글에서 오스트리아의 온갖 지역을 찍은 사진들을 찾아내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간단하고 신속하게 정확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는데 뭐하러 외우겠습니까?
친구들의 메일과 연락처를 외우는 것은 사람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SSD와 Micorosoft® Excel 2016이 훨씬 더 잘 합니다. 목적지까지의 길을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내비게이션이 훨씬 더 잘 합니다. 오늘 점심을 주문할 배달업체 전화번호를 기억하는 것은 사람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스마트폰 앱이 훨씬 더 잘 합니다. 사차방정식의 근을 구하는 것은 사람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공학용 계산기가 훨씬 더 잘 합니다. 제비가 맨몸으로 나는 속도는 얼마입니까? 사람이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구글 검색 엔진이 훨씬 더 잘 합니다. 무슨 말인가? 아프리카 제비 말인가, 유럽 제비 말인가?
극한 그까짓 거, 컴퓨터 쓰면 입력하는 게 푸는 것보다 수천 배 오래 걸립니다
현대인은 단순 암기와 단순 계산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인간의 뇌를 진정 인간답게 하는 역량들"은 오히려 가장 인간답지 못한 단순 암기 능력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아는 것이 많아도 인터넷보다 유식할 수는 없으며, 아무리 계산이 빨라도 계산기보다 빠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진정 인간다운 능력, 창작과 논리의 능력은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은, 실제로는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컴퓨터가 되는 것입니다.
디지털 기기에 의존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입니다. 인간 자체의 능력이 퇴화한다고 인류가 퇴보하였습니까? 오히려 인류의 역사상 인간의 능력은 점점 줄어들어 갔습니다. 당장 인간과의 공통조상이 가장 가까운 침팬지의 힘은 인간의 5배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침팬지의 1/5의 힘으로도 세계적으로 마음만 먹으면 침팬지 따위는 어렵지 않게 멸종시킬 수 있습니다. 인간이 불로 음식을 익혀 먹으며 인간의 위장은 훨씬 까다로워졌습니다. 인간이 농사를 시작하면서 수렵생활 때의 사냥 능력을 상당히 잃어버렸습니다. 문자와 책을 발명하면서는 방대한 내용을 구전 전승으로 이어 가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산업 혁명 이후에는 자신이 쓸 간단한 물건조차 직접 만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일기 예보가 시작된 다음에는 날씨에 대해 직접 어떤 예측을 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전자계산기가 보급된 이후로는 사람들은 다들 계산기를 사용합니다. 정보화 이후 장문을 직접 손으로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인류는 정말 끔찍하게 퇴보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1차 세계 대전 중으로 전차가 최초로 등장했습니다), 200년 전(아르헨티나가 스페인에게 독립하고 제임스 먼로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500년 전(조광조가 막 뜨기 시작했고 이 때 홍문관 수찬이 되었습니다), 1000년 전(고려 현종 재위 시기로, 2년 뒤 거란이 침입합니다), 2000년 전, 5000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디지털 기기가 주는 막대한 정보와 편리성, 효율성은 인간의 개인적인 능력의 악화를 감수하고도 남을 가치가 있습니다. "그들"이 디지털 세대를 멍청하다고 비난하나, 이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알아내는 것입니다. 수많은 것을 알고 다니는 "그들"이 아니라, 당장 외우고 다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으나 스마트폰만 있으면 온 세상에서 정보를 찾아 순식간에 "그들"이 외우고 다니는 것보다 더 많은 지식을 알아내는 힘을 가진 이들이 진정 유식한 것입니다. 이제 진정한 힘은 아는 것이 아니라 알아내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역사를 거스르는 반동에 불과합니다.
P.S. 오늘은 자체 휴강 72화를 보시면 더 좋습니다.